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천주교는 초기에는 신앙보다는 학문적 성격이 강했다. 천주교가 본격적인 신앙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18세기 후반이었으며 사회의 모순에 개혁의지를 보이던 남인 계열의 실학자들의 환영을 받았다. 특히나 이승훈의 역할이 컸다고 볼 수 있다. 초기의 한국 역사 속에서 천주교는 빠르게 사라질 줄 알았지만 그렇지는 않았다. 그런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이어지기도 했었는데. 크게 신해박해,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로 나눌 수 있다. 신해박해의 경우 정조 15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1797년이다. 천주교 신자인 윤지충이 모친상 시 신주를 불사르고 천주교식 장례를 치르게 되어서 이를 알게 된 관아해서는 이 윤지충과 그 일가를 사형에 처하였다. 허나 상대적으로 이 시기의 정조는 천주교에 대하여 관대하였으므로 천주교로 보자면 아주 힘든시기는 아니었던 것이다. 다음의 신유박해의 경우 순조 원년에 발생한 사건이다. 정약종 이승훈 등 남인 학자와 청나라 신부가 사형을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. 특히나 이 시기에는 황사영 백서사건이 발생하는데, 천주교 신자 황서영이 박해 사실을 알리려다 처형당한 사건이다. 헌종때에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강해졌다. 정하상 등 많은 신도들과 서양 신부들이 처형을 당했고, 이후에 정부에서는 오가작통법과 척사윤음을 발표하기도 했다. 병인박해의 경우에는 수천 명이 순교하는 엄청난 사건이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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